두번째 조각

명절 특선의 어린이 채널처럼

보드라운 옥색의 맛

삶은 왜 이리도 처음 맞닥뜨리는 것 투성이일까?

이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고향을 떠나 혼자 살기 시작하며 지금껏 줄곧 들었던 의문이다. 아무리 인생이 처음으로 가득 찼기에 아름답다지만, 성인이 된 후로 혼자 감내해야 할 '처음'의 순간들은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태어나서 죽 자라온 집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행위 자체는 버거움의 연속이었고, 이방인으로서 맞닥뜨리는 삶은 언제나 녹록지만은 않았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쌓이면 살아가는 게 조금은 덜 버거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소위 말하는 어른들은 살아가는 게 조금 더 능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하루라도 빨리 더 나이 들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어른이라고 여길 법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 이름으로 불리기엔 부담스럽다. 예? 제가요? 어른이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윽한 향수를 뿌리고 아는 사람들 앞에 나설때 만큼이나 머쓱하다. 그만큼 나는 어른이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 이렇게 장황한 고민을 하고 있을 만큼 까다로운 조건들을 은연중에 만들어 나가고 있었나 보다. 그 기저에는 어릴 때 나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았던, 심지어 신뢰할 수조차 없었던 어른들에 대한 실망이 있었다는 걸, 그래서 절대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앙금이 깔려 있었다는 걸 참 늦게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삶을 좀 더 유연하고, 능숙하고, 여유롭게 헤쳐 나가면서, 나보다 더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지. 나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삶의 방향을 그쪽으로 조준하고 살다 보니 그래도 이방인으로 살던 초기보다는 마음의 날이 많이 무뎌진 것 같다. 예전에는 매일 밤 감정이란 찌꺼기만 남은 상태에서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놓고 잠들었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이유를 돌이켜보니 나를 기꺼워해 주는 사람들이 생겨서였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조차 부담스럽던 시절을 지나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체화하고 나서부터, 비로소 나는 꿈속에서 꽉 쥐고 잠들던 칼을 내려놓고 조금 더 넉넉해진 그 안에서 쉴 수 있었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속 따뜻한 조력자들의 모습이 얼핏 겹쳐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되고 싶은 지향점과도 같은 질감을 공유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쑥스럽게 말해본다. 어린 나는 아마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주변 조력자들의 거대한 마음의 용량과 따뜻함에 더 감탄한다. 아직도 가끔 지브리 영화들을 보며 매번 감동에 겨워 울며 잠드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통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력자 역할의 캐릭터들에 대한 소회를 풀어보며 어른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요괴가 판치는 세상에서 용기와 다정함은 가장 큰 무기’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튜디오 지브리/2000)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봤던 센과 치히로는 기괴한 악몽에 뚝 떨어진 상황을 체험하는 것만 같았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낯선 동네의 식당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뻔뻔히 음식을 먹다가 그 죄로 돼지가 되어버리질 않나,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부모님을 두고 혼자 어영부영 발길 닿는 대로 간 곳은 인간들이 배척당하는 요괴와 신들의 세상이질 않나. 그런 곳에서 한낱 인간인 나(치히로)의 존재는 무가치해지고, 이름을 생의 담보로 빼앗기고, 영영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악덕 업주의 대욕탕에서 노동해야만 하는 상황을 생애 최초로 목도했을 때 다소 공포에 질려 어지러웠던 어린이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낯선 곳에서 부모님을 잃고 아동 노동 착취의 현장에 떨어지는 상황이라니, 성인이 된 이후에 꾸어도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악몽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치히로를 챙겨주던 린이라는 캐릭터가 구세주와 다름없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린 또한 무시무시한 마법사이자 악독한 사장인 유바바에게 고용된 힘 없는 직원이었다. 본인 또한 마냥 여유롭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자신보다 어린 치히로를 거둬들여 일터의 규율을 알려주고, 입을 옷을 챙겨주고, 일을 알려주고 식사를 가져다주는 모습은 오늘날의 일터에서도 쉬이 보기 어려운 이상적인 연장자이자 다정한 사수의 전형이었다. 사람들이 ‘멋진 사수’를 상상할 때 그려지는 인물상 중 하나가, 신입과 기존의 사람들 양측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그 사이를 유연하게 조율해주며 그의 적응과 성장을 돕는 사람 아닌가? 린 또한 치히로처럼 미성숙해 많은 것들이 낯선 시절을 겪었기에 그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울지 이해하고 있겠지. 또한, 그런 린이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던 치히로에게 선뜻 손을 내밀 수 있었던 친절함과 용기 또한 여전히 잊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후반부에서 치히로가 굉장히 극적인 고난들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이 난제를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며 린이 "센, 너보고 어리바리하다고 한 거 취소할게!"라고 외치는 순간에 밑줄을 치고 싶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가장 약자로 여겨지던 인물이 겁에 질려 스스로가 집어삼켜지지 않고, 오히려 나의 도움을 근간으로 가장 작은 영웅이 되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련을 극복하는 걸 목도한 린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순간이 바로 린의 조력자의 임무가 끝나는 지점, 그리고 치히로의 성장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리바리하고 서툴던 소녀가 다른 소녀의 도움을 받아 타고난 용기와 기개로 정의를 구현하는 이야기. 지독한 꿈 같은 상황에서도 타인의 온정을 밑거름 삼아 점차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이는 소녀의 이야기. 나에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런 영화다.

‘슬럼프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법’


– 마녀 배달부 키키 (스튜디오 지브리/1989)

이 영화는 초보 마녀 키키가 반려묘 지지와 함께 보금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해 1년 동안 마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겪게 되는 이야기다. 키키는 특출나게 뛰어난 마법 실력은 없지만,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있는 재능을 응용해 항구 마을의 어느 한 빵집에 배달부로 채용된다. 갓 사회에 던져진 키키에게 호의를 베풀어, 키키는 오소노 씨 가게 건물의 빈방에서 지내며 바삐 일하며 살아간다. 마녀와 일반 사람들이 공존하는 이 판타지 같은 세계관에서도 현실적인 구석은 있었다. 타지에서 일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은 고향의 사람들처럼 마냥 살갑지만은 않았다. 더불어, 영화에서 키키는 항구마을에서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되는 또래의 아이들과 상당히 대조되게 연출된다. 키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며 바삐 살지만, 그에게 호감 어린 호기심이 동한 톰보라는 남자아이와 친구들은 늘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어울려 노는 모습만을 보여주거나, 비행기를 직접 만들어 하늘에 띄워보듯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평범한 유년기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들이 여전히 고향이라는 품 안에서 편안하고 익숙한 모습으로 지낸다는 게 실은 이상하지도 않지만, 그와 대조되는 키키의 모습이 타지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 마냥 석연치만은 않았다. 근사한 옷을 입고 놀러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키키는 의기소침해하기도, 자존심이 상해 혼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누워 푸념하기도 하는 모습은 사실상 키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키키는 갑자기 마력을 잃게 되어 빗자루도 타지 못하고 반려묘 지지와 대화도 하지 못하게 된다. 빗자루 운전만이 키키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자 생계 수단이었는데! 더군다나 지지는 고향에서부터 줄곧 함께해온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는데 말이다. 키키에게 마력은 당연히 공기처럼 존재하던 것이기에 혼란에 빠진 와중, 그는 예전에 배달 일을 하다 마주쳤던, 숲속에서 홀로 오두막을 지어 살아가는 화가 우슐라와 재회하게 된다.

우슐라는 앞서 소개한 린처럼 주인공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은 조력자로서의 포지션으로 그려진다. 우슐라는 홀로 지내며 숙식을 해결하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새들을 관찰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본인의 꿈을 좇는 사람이다. 우슐라는 오랜만에 만난 키키를 본인의 오두막에서 먹이고, 재우고, 함께 산책하며 슬럼프에 빠져 우울해하는 키키를 달래준다. 키키가 슬럼프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자 우슐라가 전해주는 이 말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림이 안 그려질 때가 종종 있어. 그럴 때는 버둥거릴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리고, 그려대는 거야.

– 그래도 여전히 날지 못하면?

그리는 걸 관두지. 산책하거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해. 그러는 도중 갑자기 그리고 싶어지는 거야.

우슐라 또한 완전한 형태의 어른은 아니다. 그는 그가 꿈꾸는 것처럼 본인만의 그림을 그려내고자 하는 과정에 있다. 우슐라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슬럼프를 겪는 키키에게 슬럼프 자체를 극복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우선 본인을 돌보며 페이스를 찾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숱한 밤들을 고민으로 보내며 그가 나름대로 슬럼프—또는 본인 자체—를 다루는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 태도에서 읽을 수 있는 맥락은, 이러한 슬럼프에서 오는 슬픔과 갑갑함은 결국 인생을 통틀어서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포용했다는 점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작은 항구 마을에 큰 비행선이 추락하는 5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소란이 일어난다. 하필이면 그 비행선에서 톰보가 추락할 위험에 처했는데, 키키는 그가 비행선에서 추락하는 찰나에 마력이 돌아와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어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구조한다!

그 이후로 항구 마을의 영웅이자 유명 인사가 된 키키는 이 동네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여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 담긴 ‘우울할 때도 있지만 저는 이 마을이 좋답니다.’라는 대사가 이 영화를 완벽한 결말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키키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슬럼프는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엄마가 직접 만들어 준 빗자루는 고장이 나 더 이상 탈 수가 없지만, 키키는 키키가 선택한 마을에서, 키키가 선택한 새 빗자루로 살아가게 되었다. 앞으로 다시 마력이 사라지는 순간이 올 수도, 빗자루가 또 부러져서 날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슬럼프와 실패의 감각은 키키가 더 성장하게끔 하는 자양분이 될 테니까.

사실 어른이라는 단어는 내가 이상적인 사람에 대해 서술하고자 편의를 위해 가져온 이름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앞서 소개한 캐릭터들처럼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혼재된 상태다. 집을 떠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환경에서 적응에 적응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실수투성이에다 종종 투정을 부리고, 별것도 아닌 일에 욕심을 내기도 하고, 가끔은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압도되어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질곡이 없는 완벽한 존재들일 수는 없지만,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너그러이 포용하고, 서로의 존재 안에서 쉬어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내가 이 커뮤니티 안에서 느끼는 만큼의 안정을 당신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애정 어린 도움과 자신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나를 찾아가는 행보 자체가 이상적인 삶으로 향하는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치히로와, 린과, 키키와 우슐라를 향해 사랑과 응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모호

본업 드래픽 기자이너.


사실은 헤이그 얼레벌레 클럽 명예 회장.


2023년에는 지부를 다른 도시로 옮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요즘엔 난데없이 슬램덩크에 빠져 있습니다.

aspirinx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