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비 인형 두 개에 웨딩드레스를 입힌 다음 결혼을 시키곤 하던 아이였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바다언니와 장나라. 주변엔 여자 친구들만 잔뜩에 나는 여자랑 결혼할 거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 아이. 짝지어주는 남자 친구들에게는 시큰둥하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너랑 짝을 하고 싶었는지 절절히 호소하던 조금은 피곤한 아이… 신기했던 건 주변에서 아무도 그런 나를 말리지 않았다! 어른 그 누구도 내 언행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음에도…
그리고 자라나며 나는 집안 어른들이,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던 이유는 바로 저러다 말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물 두 살이 되고, 내 커밍아웃에 경악하던 엄마를 보며 깨달았다… 첫 커밍아웃 실패, 가장 가까운 사람이 진정한 나를 인정해주고 포용해주지 않는다는 공포! 그때 느꼈던 배신감이란!! (지금 생각해보면 배신감까지는 너무 갔다.) 퀴어에게 가족이란…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가깝고 평생을 함께 살았음에도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걸까? 엄마랑 나는 이십 년을 넘게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사춘기는 한참 전에 넘긴 어른이 됐는데도 말이다. 이렇게나 가깝고도 먼 사이라니…
어른이 되면 무한의 자유가 생겨서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어린이일 때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나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한국에서는 동성혼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갈 때쯤이 되어서야 내가 남들과는 다르고 다소 ‘이상한’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모노톤의 한국 사회에서 총천연색의 구경거리는 절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비와 미미를 결혼시키는 일도, 요란하게 여자 아이돌들을 쫓아다니며 좋아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마음에도 없는 같은 반 남자애들의 이름을 대충 둘러대곤 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며 배운 건 포기하는 법, 인내하는 법, 티가 나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법 따위인데 이런 저도 어른이긴 어른인 걸까요?!
어른이란 무엇일까? 보통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사회에서 어른 취급을 받지만,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여러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어른’이 되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나도 내가 성인이고 물러설 곳 없이 어른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도 힘든 일들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이라거나… 엄마로서 나 같은 딸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거나… 학교 혹은 직장에서 내내 사회의 정상성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사람인 듯,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계속해서 연기를 해야만 한다거나… 혐오 발언을 들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거나… 애인에게 사실은,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거나… 어쩌면 우리는 사실 태어났을 때 가장 용기 있고 완전하며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될수록 무력하고 불완전해지는 게 아닐까?